현장의 일은 머릿속에 다 있는데,
왜 '화면'으로는 안 옮겨질까
인트로에서 말씀드린 그 첫 시스템(현장 CRM)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현장 일은 10년째 손에 익어 눈 감고도 하는데, 막상 "이걸 시스템으로 만들자" 하니 첫 줄부터 막혔습니다.
저는 고가 장비 AS/CS와 물류 현장에서 일했습니다. 접수를 받고, 점검·수리를 맡기고, 부품을 갈고, 발송하고, 입금을 확인하고 — 이 흐름은 머릿속에 사진처럼 박혀 있습니다.
사실 저는 개발을 아예 모르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1년 6개월 공부했거든요. 그런데 그 시작부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처음 6개월은 학원을 다녔는데, 좀 황당한 일이 반복됐어요. 2개월짜리 기초반을 다 들으면 그 반이 없어지고, 다른 언어 기초반을 또 2개월 듣고 나면 그 반도 없어지고. 그러더니 "이 정도면 중급반 가셔도 돼요" 해서 얼떨결에 올라간 중급반마저 사라졌습니다. 배움은 매번 처음으로 리셋되는데, 결제는 1년 치가 되어 있었죠.
학원비, 작은 돈 아니잖아요. 들인 시간은 더하고요. 그래서 따졌습니다. "처음 기초 2개월은 제대로 배운 걸로 치겠습니다. 그런데 나머지는 같은 걸 반복한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 2개월만 빼고 환불해 주세요." — 제가 CS로만 10년을 먹고산 사람입니다. 소비자보호법, 제가 좀 알죠. 결국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남은 1년은 혼자 독학했습니다. 어설프게가 아니라 작정하고요 — HTML·CSS로 시작해 jQuery, PHP, MySQL, 자바스크립트, 부트스트랩까지. 폴더로 백 개가 넘는 분량을 "뼈대 외워야 한다, 월천 벌자" 되뇌며 갈아 넣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프론트부터 백엔드까지 훑고 나니, '언어'는 어느 정도 익혀지더라고요 — 정확히는 "아, 이게 이거구나" 하고 감을 잡은 정도까지요.
그런데 — 그렇게 다 배우고도, "직접 시스템으로 만들어보자"고 빈 화면을 켠 순간 손이 멈췄습니다. 일은 다 아는데, 그 일을 '화면'과 '데이터'로 옮기는 법을 모르겠더라고요. 코드를 어디서부터 쳐야 하는지도 막막했고요. 이게 비개발자가 만나는 첫 번째 벽입니다. 업무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업무를 시스템의 언어로 번역하는 법을 모르는 거죠.
제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이거였습니다. "지금 쓰는 엑셀을 그대로 화면으로 만들면 되겠네." 그래서 엑셀의 칸을 하나하나 입력 칸으로 베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금방 무너졌습니다.
엑셀을 그대로 옮기려는 시도는, 사실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을 그대로 옮기려는" 시도였습니다. 그게 안 되니 막막했던 거죠.
접수 한 건을 떠올려 보면, 그 안엔 너무 많은 게 엉켜 있습니다.
현장에선 이걸 한 줄에 다 적습니다. 그런데 시스템에선 "고객"과 "장비"와 "부품"이 각각 따로 살아야 합니다. 같은 고객이 또 맡길 수도, 같은 부품이 여러 건에 쓰일 수도 있으니까요. 한 덩어리를 어떻게 쪼개야 하는가 — 이게 두 번째 벽이었습니다.
여기서 AI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코드를 짜달라고 한 게 아니라, 제 현장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으로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한 건이 어떻게 들어와서 어떻게 끝나는지를요. 실제로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렇게 전체 흐름(뼈대)을 쭉 세우고 나니, 막막함이 풀렸습니다. 화면이 저절로 이 순서대로 정리됐거든요. 그다음엔 각 단계에 곁가지를 붙였습니다 — "부품이 없으면?", "무상 보증이면?", "고객이 수리를 거절하면?" 같은 예외들이요.
저는 처음에 "무슨 버튼, 무슨 화면"부터 생각하느라 막혔던 건데, 시작점은 일의 흐름이었던 겁니다. AI는 이 흐름을 같이 정리해 주고, 제가 빠뜨린 곁가지를 되물어 준 팀이었고요.
막막함을 풀어준 건 거창한 기술이 아니라, 세 가지 단순한 관점이었습니다.
- ① 업무 흐름(뼈대)을 먼저 한 줄로 — 곁가지는 나중에 — 위처럼 "문제 발생 → … → 발송"을 쭉 세우고, 예외는 곁가지로 붙입니다. 큰 줄기가 서면 화면이 그 순서대로 정리됩니다.
- ② '저장할 것'과 '할 일'을 나눈다 — 계속 두고 쓰는 것(고객·장비·부품)은 데이터로 저장하고, 한 번씩 일어나는 일(접수한다·수리한다·발송한다)은 행동(버튼·기능)으로 만듭니다. 엉킨 한 덩어리가 이 둘로 갈리면 쪼개집니다.
- ③ "누가 보나"로 화면을 나눈다 — 같은 정보라도 접수 담당과 수리 담당이 볼 화면은 다릅니다. 이 관점이 나중에 역할별 화면 · 엑셀 보고서 없애기로 이어집니다(인트로에서 말한 그 핵심이요).
결국 기획의 벽은 "내가 머릿속에 뭉쳐 놓은 일"을 업무 흐름(뼈대) · 저장할 것과 할 일 · 보는 사람으로 풀어내는 작업이었습니다. AI는 답을 준 게 아니라, 제가 아는 걸 꺼내 정리하도록 질문해 준 팀이었고요.
비개발자가 처음 업무 시스템을 기획할 때, 막히면 이 다섯 가지를 점검해 보세요. 제가 벽을 넘을 때 쓴 그대로입니다.
🤝 이번 편의 결정
핵심 한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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